휘는 수형(秀亨).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도촌(桃村)이다. 1435년 세종 17년에 탄신하시어 1528년 중종 23년 정월 4일 94세로 졸하셨다. 아버지는 우계이씨 세계상 10세 인숙(仁淑)의 장남인 경창(景昌)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참찬공 안구(安玖)의 따님이었다.<우계이씨대동보> 배위는 예안김씨(禮安金氏)로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따님이며 생년은 미상이고, 명종 13년 1558년 8월 27일에 졸하셨다.<우계이씨대동보>
선대고찰 시조 휘 양식(陽植)은 고려 인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에 이르렀고, 2세 순우(純祐, ?~1196)는 문헌에 처음으로 이름을 남긴 선조로써 의종때 문과에 장원, 한림학사 국자제주 대사성에 이르렀고 금성군(錦城君)에 봉군되었다. 금성군이 무신정권의 문신대량학살 때 살해되자<동사강목,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명신전(남공철)>, 그 아드님 적(迪)은 강릉우계의 해령산으로 은거<대동보>하셨으며, 호를 옥계(玉溪)라 하고 호장을 역임하셨다. 적의 아들은 홍준(洪俊)과 공용(公用)인데, 공용은 기록이 실전되었고, 홍준은 중윤과 호장을 역임하였다. 홍준의 아들 구(球, 1265~?)는 18세에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임금이 친히주관)의 진사시에 합격하고 돌아와 예빈시승과 예빈시경동정을 역임하고, 구의 아들 백경(伯卿, 1290~?)은 영동정, 천승(天升)은 검교군기감정인데, 백경의 아들 사성(思成)은 밀직대부로 중추원사에 추봉되었다. 사성의 아들이 억(山+疑)인데, 억이 곧 공의 고조부였다.<대동보>
가족이력 고조부 휘 억은 고려말기에 유장으로 강계원수와 밀직부사를 역임하며 요동정벌에 훈공을 세웠으나,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자, 삼고의 예로 도평의사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순흥의 소백산으로 은거하여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후에 가정대부 중추원부사 도평의사사 겸 의흥친군위동절제사에 추서되고, 원종공신 1등관에 녹훈되고 토지와 전답이 내려졌다. 휘 억이 삼사사 좌윤 안영부(安永孚)의 따님을 배위로 하여 만과 직장 원길(原吉)을 낳으시니, 공의 증조 만(蔓)은 고려말에 무과에 급제하여 홍로부사, 인진사 등을 거쳐 중추원부사와 사재감을 역임하였으나, 조선 건국후에 벼슬이 강등되어 봉렬대부 호분위경력으로 별세하였다가 후에 판중추부사에 증직 추서되었다.<대동보, 양경공 정희계 묘갈명(양경공은 이만의 처부)> 휘 만은 계림부원군 양경공 정희계(鄭熙啓)의 따님을 배위로 하여 1남 인숙과 1녀(女 閔無恤)를 두었으니, 공의 조부 인숙(仁淑)은 조선에서 관직에 올라 사정, 중추원경력을 거쳐 통훈대부가 되었으며 1435년 왕명을 받고 지덕천군사로 부임하니, 지덕천군사(덕천군수)로 부임한 사실이 세종실록 18년 기사에 기록되어 있다. 후에 벼슬이 판사복시사에 이르렀다.<대동보, 세종실록 세종 18년 기사> 휘 인숙은 지인천군사 오부(吳傅)의 따님을 배위로 하여 4남 3녀를 두었으니, 그중 장남이자 공의 선친인 휘 경창은 최종관직이 봉렬대부 군자감주부에 이르렀는데, 처가인 순흥안씨 참찬공 안구의 자녀 기록에는 직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휘 경창이 참찬공 안구의 따님을 배위로 맞이할 때, 처음 벼슬은 직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휘 경창은 음보로 직장으로 출사하여, 봉렬대부 군자감주부까지 역임하셨던 것이다.
모친은 순흥안씨로 직제학 안구의 따님이었다. 외조부 안구는 초휘는 안치(安致)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의정부좌참찬에 증직되셨다. 외외조부는 전주이씨 완천군 이숙(李淑)으로 태조 이성계의 서조카였다.
아우 말형(末亨)은 장사랑을 역임하였는데, 순흥안문 기록에 이경창, 장자 수형, 차자 사형, 녀 정이득으로 기록되었는데, 말형의 처음 이름(초휘)가 사형(士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직강 정이득(鄭而得)에게 출가한 여동생이 한분 계시다.<순흥안문 기록> 정이득에게 출가하신 따님의 기록은 우리 대동보에도 기록이 있다.
배위 배위 숙인(淑人) 증 정부인 김씨는 예안인으로, 부친은 이조판서 문절공 김담(金淡)이고, 조부는 증 병조판서 소량(小량)이고, 증조부는 증 호조참판 로(輅)이다. 외조부는 직강 문헌(文獻)이다.<예안김문 자료> <디지털한국학 문과급제자 김담 편 참조> 부인은 1558년 명종 13년에 졸하셨으며, 1858년 철종 9년 부군(夫君)이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로 증직되시자 숙부인(淑夫人)으로, 1867년 고종 4년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가증되시자 정부인(貞夫人)으로 가증되셨다. 4남을 두셨으니<우계이씨대동보>, 장남 대근(大根)은 음보로 선교랑 관상감주부를 역임하고 1496년 생원시에 합격하여<사마방목, 단 홍천공 대근이 생원시에 합격한 사실은, 대근의 묘갈명에도 나와 있다.>,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홍천현감을 역임하고, 양근(養根)은 음보로 통훈대부 전설서별좌, 성근(盛根)은 감역, 준근(峻根)은 참봉을 역임하였다.<우계이씨 대동보>
생애 도촌선생실기 사우록에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 원호(元昊), 조여(趙旅), 송석충(宋碩忠) 등이 기록되셨으니, 공이 곧 장인되시는 문절공의 문인이셨던 점도 알수 있다.<도촌선생실기 인터넷검색결과> 1451년 문종 1년, 약관 17세에 음보로 출사하여 관직에 오르셨다. 부친의 품계가 정4품 봉렬대부였고, 조부의 품계는 정3품 당하관 통훈대부였으니, 5품이상 고위관료의 자제들이 음보로 출사할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던 것이다. 대동보에는 통훈대부 평시서령 혹운 전생서령으로 기록되어 있다.<대동보> 처부 문절공 김담의 자녀기록에 선무랑(종6품) 전생서령으로 기록되었고<예안김문 자료>, 후대에 도촌공에게 내려진 증직 교지를 보면,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행 조봉대부(종4품) 평시서령으로 나와 있는바, 도촌은 17세에 음보로 출사하여 선무랑 전생서령을 역임하시고, 문종(文宗) 연간에 조봉대부로 승진하시어 평시서령을 역임하셨던 것이다.<증직교지> 전생서는 왕실의 동물을 사육하는 기관이었고, 평시서는 시장의 물가를 조절하는 기관이었다. 1455년 단종 3년, 충신들이 귀양가거나 벼슬에서 물러나고 시류가 혼탁해지자,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과 권신들의 강압에 못이겨 양위하자, 이때 벼슬을 버리고 처가 근처인 있었던 영천(순흥이라고도 한다.) 도촌으로 낙향하셨으니 이때 공의 나이는 21세였다.<대동보, 이조명인열전> 이때에 사육신(死六臣)은 단종대왕을 복위하려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충절들과 그 가솔들은 모두 몰살되고 집안여인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이때 단종대왕은 권관들의 탄핵을 받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시고 영월(寧越)의 청령포로 유배되셨는데, 공은 낙향 후에도, 동료인 관란(觀蘭) 원호(元昊) 공, 어계(漁溪) 조여(趙旅) 공과 함께 영월 수주의 요석정에 모여, 국사(國事)와 단종대왕의 안위를 논하셨으며, 단종대왕이 유배되신 청령포를 다녀오시기도 하였다.<지금도 강원도 영월 수주면에 요석정이 소재하고 있다.>
세 분은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 올라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을 것임을 굳게 맹세하고, 바위에 이름자를 새기고 내려오셨다.<치악산에 세분의 名字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공은 단종대왕을 바라보며 영천 도촌에 은거하시던 중, 1457년 순흥으로 유배되었던 금성대군(錦城大君, 세종의 5남),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등이 제2차 단종복위운동을 거사한다. 그러나 금성대군댁 노복의 밀고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바로 금성대군은 사사되고, 부사 이보흠은 처형되었으며, 순흥 주민들은 학살당하고, 순흥은 부에서 현으로 행정구역이 강등된다. 이때, 간신들의 탄핵을 받아 단종대왕은 유배지에서 사사된다. 단종대왕의 시신은 후에 영월 호장이었던 엄흥도에 의해 거두어져, 노루가 앉았던 양지바른 자리에 매장되고, 엄흥도는 그곳을 떠난다.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은거하셨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공 또한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셨음이 확실하다. 금성대군이 피흘린 자리를 후에 공의 아들 홍천현감 대근(大根)이 지나치던 중, 꿈에 금성대군으로부터 자신이 피흘린 곳임을 전해듣자, 봉축하고 단을 쌓으셨으니 금성단(錦城壇)이라 한다. 그곳에는 이선달이라는 분이 금성대군의 피묻은 돌을 사당에 모셨다는 전설이 전승되고 있다.
공은 단종임금의 3년상을 치루었으며, 산으로 들어가 삼면은 벽으로 되고, 북녘을 향해 문이 하나 있는 집을 짓고 은거하셨다. 도촌의 지세로 보아 동남쪽을 향해 문을 내는 것이 당연하나, 북녘을 향해 문 하나를 열었던 것은, 단종대왕의 능침이 있는 장릉이 영천(혹은 순흥)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은 공북헌(拱北獻)이라 현판을 달고 행장과 유기를 남겼고,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은 천인실(天人+刃室)이라 하였다. 세조임금은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 어렸을 때부터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라, 친히 식물(食物)과 전답을 하사하며 힘써 관직에 기용하려 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臣無二君)의 굳은 절의로 모두 거절하였다.<대동보>
사마방목의 이대근(도촌공의 장남으로, 후에 홍천현감 역임)의 기록 중 부친 성명 李秀亭(잘못 기록됨, 실제 이러한 기록이 많음. 혹은 초서체를 잘못 해독한 것일수도 있음), 부친품계 어모장군, 부친관직 행충좌위 부사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대동보에 나와있는 장침랑 평원 이광정 공이 근식(謹識)한 도촌선생묘갈명 중에 어모장군 부사직이라는 글귀가 있다. 그리고 대동보를 보면 통훈대부를 역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 역임하신 관직은 선무랑(종6품) 전생서령과 조봉대부(정4품) 평시서령이 마지막이셨으니, 이때 세조는 어모장군(무관 정3품 당하관) 행충좌위부사직과 통훈대부(문관 정3품 당하관)의 벼슬들을 내렸으나, 이또한 불사이군의 절의로 모두 거절하셨던 것이다.
공의 가계를 보면, 우선 부친 경창이 정4품, 조부 인숙은 정3품, 증조부 만은 종1품, 고조부 억은 개국원종공신이었다. 외가를 보면 외할아버지 안구가 정3품 통정대부로 정2품에 증직되셨으며, 외외증조부는 완천군 이숙으로, 왕족이었다. 외숙부 안지귀는 대사성을 역임한 당대의 고관이기도 하였다. 처가를 보면 장인 김담이 정2품 대신으로 시호를 받았으며, 이상 3대가 고위관직에 추증되었다. 임금이었던 세조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분이 두터운 친구였으며, 사적으로는 공에게 외가 일가가 되었으니, 작심하셨다면 충분히 고위관직에 나가실 수 있었다. 그러나 도촌은 그러한 행동을 옳지않게 보시고 모두 미련없이 버리셨던 것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 신선이 산다는 그곳에서 아호를 취하시어 호를 도촌이라 하셨다. 도촌의 또다른 의미로는 복숭아골이 되기도 한다. 공이 사셨던 동리를 이후 사람들은 도촌리라 하였으며, 공은 일평생 은거하시며 단종을 추모하며 생활하였다. 공은 세상의 인연을 버리셨지만 간혹 원호, 조여, 송석충 등의 문인들과 교유하셨다.<도촌선생실기>
세월이 흘러 세조, 예종을 거쳐 성종대인 1477년 성종 7년 임금께서 사림을 등용하시고, 후에 다시 직첩이 내려졌음에도 공은 역시 받지 않으셨다.<성종실록 성종 7년> 90세 가까이 생존하셨으면 당시 국가의 법률인 대전회통의 조항에 따라 수직(壽職, 노인직)도 내려졌을텐데 공은 이것도 받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우계이씨 족보에도 70세 이상 장수하신 노인들로써 은전으로 내리는 벼슬, 수직을 받으신 분이 여러 분 되신다. 70여년을 단종임금을 추모하며 늙도록 서울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1528년 중종 23년에 졸하셨으니, 수 94세였다. 일생을 세상과 등지고 사셨으니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음이 다만 한탄스러울 다름이라.
공은 일찍이 손수 괴화나무를 한그루 심으셨다. 눈이오고 비가오는 70여년의 긴 시간을, 공은 홀로 괴화나무를 바라보며, 시문을 지으셨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오던 공이 별세하자, 괴화나무도 함께 고사하였다. 세월이 200여 년이 흘러, 단종대왕이 노산군에서 다시 임금으로 복위되시고, 단종의 묘호를 받으시자, 고사하였던 괴화나무에서 다시 잎이 돋아났다 한다. 오랜세월 공의 곁에 있으면서 공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리라.
단종임금에게 충성한 사육신과 여러 충절들, 그리고 희생된 많은 사람들, 단종폐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생육신과 여러 절신들을 공주(公州)의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할 때, 공 또한 배향(配享)되었다.<공주 동학사 숙모전> 1610년 광해군 2년 순흥 지역유림들이 공의 행적을 추모하고자, 공이 은거하시던 곳 근처에 견일사(見一寺)를 세우고 공과 금성대군, 이보흠을 제향하였다. 후에 견일사는 도계서원(道溪書院)으로 편액되었으며, 1715년 숙종 41년 공의 4대손이자 광해군의 폐모살제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낙향한 취사 이여빈(李汝香+賓)도 배향되었다.<영주 도계서원>
도계서원에 제향될 때, 고심당(古心堂) 조정융(曺廷瀜) 공이 찬한 상향축문(常享祝文)에 이르기를, 고요한 심지(心地)는 자취가 없으나 완부(頑夫)를 절조(節操)가 고결(高潔)한 사람으로 인도(引導)하는데 공이 있으며, 부춘산(富春山) 하동강(下桐江)은 고결한 행적이 있고 율리(栗里)로 돌아간 도잠(陶潛, 도연명)과 같은 풍도(風度)가 있었다 라는 구절이 있다.<대동보>
1858년 철종 9년 학사 임응준(任應準)의 상소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고, 1867년 고종 4년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가증되었다.(이때의 1864년(淸國 同治 9년) 교지가 남아있어, 지난 1984년 갑자보 발문에 이수형 증직교지 사진이 첨부되었다.)
임응준, 인물기록을 살펴보았는데, 당시 경상도 암행어사로 부임하였음.
이홍선: 桃村 李秀亨에 대한 고찰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직계18대손 弘善입니다 도촌 선조의 寧越 配食壇祠와 彰節書院에 배향에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저의 주소는 경북 봉화군 봉화읍도촌리463 전화는 054-673-6600입니다. -[04/13-15:08]-